지식의 지평

기획특집

Editor’s - 혐오 증오 분노의 일상화: ‘낯섦’과 ‘다름’ 앞에 선 인간의 부끄러운 얼굴

36호 - 2024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김광억

1.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염려스러운 혐오와 증오

   우리의 일상세계는 매일 매일 내가 타인과 사물과 사건을 직접 만나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는 ‘경험적 현실’과, 내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하여 접하는 정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상상 혹은 ‘가상 현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과학·기술·사회의 결합(STS) 정도가 극도로 높아진 당장의 사회에서는 경험적 현실과 가상 현실이 더욱 정교하게 결합되어 두 개의 분리는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교직된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우리’와 ‘저들’을 범주화하고 분류체계와 정의를 적용하여 왔다. 

  그중에서도 혐오(싫어함), 증오(미워함), 그리고 분노(화냄)는 인간에게 특유한 대표적인 감정이지만 그것이 이념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적인 행위라고 할 것이다. 혐오, 즉 싫어함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 즉 진, 선, 미, 정의, 공정, 올바름에 맞지 않은 것을 회피하고 거리두기를 하는 등의 거부적인 반응과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 ‘싫어함’은 음식이나 놀이를 결정하는 데서 보듯이 선택권이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 취향에 따라서 거부의 감정을 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어(漢字語)인 ‘혐오’는 어떤 이념적 기준과 가치관에 의거하여 사회적 참여의 한 형태로서 싫어하는 감정을 보다 분명한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특정 상품을 싫어하는 것과 그 상품 뒤에 얽혀 있는 기업의 비리나 횡포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뜻으로 그 상품의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증오는 ‘미워함’보다 정도가 심하여 가치관과 윤리관 이념 등에 어긋나는 존재와 형상에 대한 격렬한 부정과 거부의 마음 상태이자 몸짓이다. 그러한 사상(事象) 때문에 올바르고 바람직한 세상이 나빠지게 된다는 신념으로 인하여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거나 그러기를 적극적으로 소망하는 태도를 표출하게 된다. 증오는 거리두기나 회피하기와 같은 소극적인 반응에서 없어지기를 요구하고 추방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하게 반대와 기피를 드러내는 언행을 만들어낸다. 분노는 마침내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적극적 반사 행동을 유발하는 충동적인 감정의 격렬한 상태를 말한다.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는 개인이 자신에 대하여 내면적인 성찰과 가치의 고양을 향한 노력을 격려하는 이른바 ‘분발’의 기능을 하며, 올바르지 않은 것이나 악함에 대한 거부와 극복의 강력한 도덕적 행위이다. 혐오·증오·분노의 언어는 기실 진실과 선함의 실천과 강화의 한 방법이며 적극적인 참여방식이기도 하다. 분노할 줄 모르는 인간은 분발하는 계기와 힘을 가질 수 없으며 모든 발전과 진보는 개인의 차원에서든 집단의 차원에서든 분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 분노는 역사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 『일리아드』는 분노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부도덕, 폭압, 부정부패, 독재 등에 대한 민중의 자각과 봉기 등이 모두 그러한 분노에서 발로되는 것이고 창조적 예술과 정치사회적 혁명을 비롯한 역사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금을 통하여 민중의 지지를 유도하는 가장 간단하고 강력한 구호는 “분노하라!”는 것이었다. 현대의 대중 민주정치에서는 더욱 그것이 사용된다. “분노하라”는 구호는 심판, 응징, 척결의 격정적인 정치적 상징과 욕망을 담고 있다. 혁명의 역사는 이를 선동하고 운영하는 정치의 산물이다(Sloterdijk 2006).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우리는 혐오와 증오의 언행을 다른 각도에서 심각히 논의할 시대적 필요에 처하고 있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분노의 표출이 모든 영역—심지어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영역—에까지 만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오늘날 분노의 내용과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과 행태는 기존의 관용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새로운 통합과 질서를 기대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것은 오히려 끝없는 새로운 갈등과 증오의 확대재생산을 초래할 것이 명백하다. 즉, 현재의 부당함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파괴의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와 증오의 표현—엄밀히 말하자면 ‘혐오스러운 표현 또는 증오를 퍼붓는 과격하고 잔혹스러운 표현’—이 통제 조절의 제도적 능력을 넘어서는 현실에 대해서 그동안 적잖은 우려와 경고와 대책 마련의 시급성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사회의 성원들이 편가르기와 혐오와 증오의 유행에 참여하는 원인과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형태이다.  

2. 혐오와 증오: ‘다름’과 ‘낯섦’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재조(再造) 

  혐오와 증오의 출현은 ‘낯섦’과 ‘다름’(차이 혹은 차별)에 대한 인식과 감정적 반응기제에 있다. 우리는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구조와 현상이 증오와 분노를 낳으며 그것은 역사적으로 계층이나 계급 갈등, 인종주의, 민족주의, 자기중심주의, 종교와 신앙의 갈등 등의 영역에서 폭력화하는 많은 경험을 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면, 진실보다 편견 혹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왜곡된 인식과 상상이 유발하는 격렬한 정치적, 심리적 반응이 폭력적 혐오와 분노로 이어지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점은 그것이 대중의 자발적 반응이 아니라 정치적 자원으로 조작되고 증폭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혐오와 증오는 그 성격과 방식과 영향력이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계몽주의 운동은 이성과 윤리, 도덕, 예의, 문명의 세련을 이루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에 대한 신념을 수립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을 제도화하였다. 그런데 그 계몽운동의 절정기에 이르러 그것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야만의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인류가 직면한 사상 최대의 모순이다. 

 

1) 문명, 제국, 식민의 야만성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인종주의와 자국중심주의로서 자기와는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재조한다. 나치주의의 폭력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현대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죄악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혐오와 증오는 문명의 이름 아래 계속 정교하고 잔인하게 발명되어 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세기의 전환기에 재빠르게 근대국가를 수립한 나라들이 자국 중심의 ‘제국’, ‘식민’, ‘문명’의 레토릭으로 타자들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가치나 자격조차 없는 존재로 규정하는 야만을 저질렀다. 저주와 비하의 단어, 수치와 모욕감을 야기하는 표현, 벌레나 짐승에 비유하여 더럽고 어리석고 수치를 모르고 거칠고 저열하고 잔인하고 흉악하며 지극히 위험한 악(惡)으로 범주화하는 분류체계를 발명하여 이를 ‘휴머니즘’의 언술로 장식하여 문화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자행하였다. 지배자의 가부장적 온정주의 뒤에는 약자의 존재를 비하하며 마침내 세상을 위하여 척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발명하는 교묘한 문화생산 기제가 작동하였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 대한 착취가 저지르는 죄악을 은폐하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비열한 시도이다.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폭력이 약자—혹은 약자라고 범주화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의식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근절 혹은 정의의 완전한 승리라는 이상은 종족과 부족 간, 인종 간, 국가 간 ‘청소’와 ‘척결’이라는 개념적 단어로 무장하여 전쟁의 형태로 행해진다. 서구의 ‘문명’과 비서구의 ‘야만’의 만남은 평화와 번영의 레토릭을 독점한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편견과 혐오의 야만적 전쟁으로 실천되었다. 물론 약자도 강자에 대하여 낙인(stigma)찍기와 증오의 표출 방법을 개발한다. 무관심·냉담·조야함·흉맹함·우둔함·무지와 무능함을 가장하여 순치와 복종의 요구를 회피하거나 예술과 종교의 장르에서 강자를 악마로 상징하거나 저주의 주술로 소환한다(Scott 1987). 그러나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낙인찍기와 인간적 존엄을 짓밟는 권리는 강자가 향유하는 무기이다. 그리고 문명과 야만의 습관화한 분류체계로 이루어진 제국과 식민의 이념과 구도는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예컨대, 1960년대 남미의 곳곳에서는 고속도로와 신도시 건설 그리고 광산개발을 포함하는 대규모 지역 개발계획이 진행되었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거대한 면적의 열대우림이 없어지면서 생태계의 급진적인 파괴로 인하여 숲속의 원주민들은 가난과 함께 이전에는 없었던 질병에 노출되고, 새로운 자연과 사회경제적 환경에 적응 능력이 없는 채로 문자 그대로 급격히 멸종되어 갔다.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들이 백인 지역으로 탈출하여 먹을 것을 훔치고 거리 곳곳에서 노숙하며 쏘다니자 백인 정부는 이들을 무지하고 무례하며 부도덕하며 흉폭한, 인간 이하의 존재로 몰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안전과 질서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살상하였다. 언어를 비롯한 백인의 문화를 모르는 원주민들은 부당한 피해의 목소리를 빼앗긴 채 희생되었다. 개발사업의 기적이 초래한 모든 파괴는 이들 희생자들이 지닌 ‘본질적’인 악의 탓으로 돌려졌다. 원주민은 ‘순진한’ 문명인들의 혐오와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들 ‘침입자’에 대한 정부의 폭력은 정당하고 거룩한 행위가 되었다(Davis 1977).

 

2) 종교의 정치화와 정치의 종교화

  인간은 신념과 신앙의 존재이다. 종교는 세속을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순수함 그리고 성스러움에 관한 믿음의 체계로서 신자들을 특별한 정신적 우월감으로 무장하게 만든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정치와 결합할 때 타 종교 혹은 이교도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파괴적 분노로 비화되기 쉽다. 여러 종교와 종파들이 평상시의 공존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폭력을 동반하는 혐오 관계를 표출한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정치를 종교화하는 것 그리고 종교를 정치의 장으로 만드는 시도이다. 역사기억의 정치와 종교적 신념, 그리고 인종 혹은 민족주의의 결합은 대중 사이에 문화적 우월성과 순수에 대한 신앙을 승화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장을 만들어낸다. 종교 갈등이 표면화하는 것은 종교가 바탕이 된 문명 세력 사이에 일어난 오랜 역사적 경험이 끊임없이 소환되기 때문이다. 그 접촉의 초기부터 유혈적 갈등의 역사를 만들어온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의 중첩되는 전쟁의 기억과 흔적은 앞으로도 결코 쉽게 지울 수 없는 혐오와 증오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진행되는 종교를 달리하는 두 세력 간의 전쟁은 순수한 종교적 갈등이라기보다 장구한 시간 동안 복잡하게 교직된 인종주의와 영토주의 그리고 역사기억이 재조하는 갈등을 종교의 성스러움과 순수함의 언술로 진행하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에서는 종교가 도덕의 감시, 오염으로부터 순수의 보호 그리고 정치적 교정의 기제인 동시에 이교도에 대한 의심과 혐오 그리고 배척의 문화적 권력으로 작동하기가 쉽다.

3. 포스트모더니티와 탈경계적 유동

  혐오의 폭력적 재조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에서 재조명된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동의 사회(mobile society), 지구화의 초국적 확장의 물결, 이로 인한 ‘다름’과 ‘낯섦’의 증가, 그리고 격차와 차별의 구조화로 특징지어진다. 동시에 이질성과 다양성의 증가 속도에 비하여 관용과 타협의 능력이 함께 성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1) 글로벌리제이션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글로벌리제이션은 자본주의체제의 확립에 따른 산업구조의 재편과 경제성장 그리고 교통과 통신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사람과 지식과 정보의 초국적 혹은 탈경계적 이동과 확산을 빠른 속도로 일상화하였다. 이는 그만큼 지구가 더욱 좁은 공간이 되었으며 문화적 이질성과 다양성이 일상세계 안에 증대함을 뜻한다. 증대한 낯섦과 다름으로 채워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일상의 세계를 공유해야 하는 낯선 자들에 대한 인식의 틀을 새롭게 만들게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이른바 선진 발전 국가에는 중장기 이주노동자와 난민이주자들이 인구 규모나 문화적으로 점차 또 하나의 뚜렷한 존재로 가시화되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된 이민 수입국의 ‘원주민’은 이들 이방인에 대하여 공존의 필요성과 공존이 제기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자신의 공동체에 동등한 권리와 자격을 주어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배척을 할 것인가 하는 긴장 속에 놓이게 되었다. 빈번히 발생하는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폭력적 갈등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순혈주의적 감정은 순결하고 건강한 공동체였던 자신들의 세계가 이들 이방인이 스며들면서 오염되었고 자신들만이 누리던 평화와 질서와 경제적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쉽게 상상한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에 편승하여 편견과 거짓말을 발명하고 혐오 표현을 언론 매체를 이용하여 확산함으로써 분노와 적개심을 갖도록 선동한다. 물론 약자도 강자에 대하여 다양한 혐오 표현을 약자의 무기로 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은밀하게 전략적 문화자본으로 내면화한다. 만약 그들이 기존 세력에 대항 집단으로 가시화하는 순간 그들은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범주화되기 때문이다. 차별과 배타는 우리가 아직도 문명의 가식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했음을 증명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전략적 자본으로 재생산되고 재소환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액체사회화 

  문화적 다양성이 사회적 동력이 되기보다는 갈등의 원인으로 작동하기 쉬운 이유는 도시화 현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성원이 통일된 이념과 가치와 윤리 그리고 익숙한 상호 관계의 연망(連網)으로 교직된 구조 속에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일탈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문화의 힘이 발휘된다. 그런데 거대도시 사회에서는 점차 삶의 견고한 기준들이 녹아내리고 개개인이 주체성을 확보함에 따라 일정한 구조적 틀을 형성했던 질서와 경계가 유동적이 되는 액체현대성(liquid modernity)을 갖게 된다(Bauman and Lyon 2012). 액체사회는 자유의 획득과 함께 규범의 상실을 대가로 치름으로써 도덕과 가치의 아노미 상태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을 연결하던 유대관계가 사라지고 냉담, 의심, 불안과 감성만이 표류하는 유동적인 환경에서 개별화가 된 사람들은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고 이기적 존재가 되기 쉽다(Bauman and Leonidas 2013). 

 

3) 계층화  

  특히 급격한 경제적 기회의 불평등한 분배 체계가 만드는 사회구조를 둘러싸고 공생을 위한 협력보다는 타자를 만들고 그를 경쟁기회로부터 배제하는 자기중심적 생존전략이 추구된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의, 혈연주의, 사적인 호혜관계가 소환되어 은밀한 배타적 상호 관계의 네트워크가 시도된다. 경제적-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응집력을 위한 문화자본의 하나로서 혐오의 독특한 표현방식을 개발하고 영웅적인 언어폭력을 어릴 때부터 습득하고 일상화한다. 패거리 짓기와 따돌림과 폭력의 조작, 불쾌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언행의 과시가 유행한다(Willis 1977). 헵디지(Hebdige 1979)가 연구한 청년들의 하위문화(sub-culture)는 1960년대를 풍미한 히피와 펑크, 버클리와 파리와 베를린에서 시작된 스튜던트 파워 운동, 반전운동 등의 반문화(counter-culture) 행위에서 보듯이 진부한 기존 체제와 가치관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는 탈계급적 문화변혁의 참신한 수단이자 과정이다. 그들의 청바지, 통기타, 장발과 단정하지 못한 복장 심지어 가출과 집단생활은 오늘날 청년세대가 특별한 어휘와 언어행위, 옷차림, 신체장식, 몸짓 등으로 표현하는 연행예술과 마찬가지로 기득세력의 전유물로 된 사회체제에 대한 반란의례(ritual of rebellion)이며 새로운 가치와 윤리를 추구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지난 세기에서 급격하게 진행된 일상세계의 구조적 변화가 가져온 사회 성원 사이의 불평등 혹은 격차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구조에 대한 불만과 불안 그리고 불공정에 대한 계급적인 적대감을 촉발한다. 특히 증대되는 다양한 욕망의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차등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이른바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사회와 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서 자기 정당성의 표현 수단 혹은 부당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재조, 유포된다. 세대, 성별, 계층 혹은 계급 사이, 심지어 인종과 지역 사이에 선별적인 낙인찍기와 공격이 조직적으로 진행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사람들은 상대방을 특정의 언어로 범주화하고 규정하여 이들을 자기와 한편으로 수용하든가 적으로 삼아 배척하든가, 즉 삼키기와 뱉기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이 삼킴과 뱉음, 즉 포용과 배제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혐오와 증오의 결과이다. 대중은 증오를 공공의 응징이라는 단어로 무장하여 집단적 폭력으로 전개한다.  

  이때, 혐오와 증오에는 사실에 대한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도덕적 반응뿐만 아니라 발명된 거짓말과 극적인 표현을 통하여 조작되는 편견의 부추김이 들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정치의 장이 되면서 대중을 조작하고 선동하기 위하여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무기화된 거짓말’이 판을 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사실 경험적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대에서 거짓말은 진실과 명백하게 분리되기가 어려워졌다. 통계수치와 여론조사, 사건의 보도가 과학성과 객관성 혹은 중립성을 담보하여 이루어지는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대중은 끊임없이 순간적으로 제공되는 보도에 대하여 진실 여부를 규명할 수 있는 일관된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다만 그때그때의 맥락에 따라 정치가들이 제공하는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는 기제로서의 특정한 표현 방식을 선택할 뿐이다. 낯섦과 다름이 다양화하고 일상화되면서 이전의 존엄과 품격의 문화가 포기되고 있다. 융통성과 자유를 실천하는 조건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자의적으로 타자를 만들고 낙인찍기를 하며 적나라한 다툼과 배제를 일삼는 공간이 커진 것이다.  

4. 타자화와 낙인찍기

1) 언어의 폭력

  그런데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를 유발하고 표출하는 핵심적인 수단은 언어이다. 말은 사람과 사물과 행위를 분류하고 이름을 지음으로써 ‘사실’을 만든다. 우리는 이 언어적 사실—즉, 언어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 사실—에 특별한 의미와 감동과 감정을 갖게 된다. 말하기는 곧 권력과 이미지를 재조하는 행위이자 과정적 수단이다(Bourdieu 1992). 문제는 이제 일상의 모든 영역과 행위가 정치의 장이 되었으며 정치과정은 말의 다툼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과 입장을 표현하는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인은 대중선동을 권력 획득의 핵심 방법으로 삼음으로써 말의 정치 기술에 몰두한다(Waldron 2012). 정치가 올바른 결정을 위한 예술적 행위(politics as art)가 아니라 목적달성을 위한 기술공학이라는 명제가 지배하면서 언어 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삼아 대중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기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치는 곧 말의 게임이라는 주장은 결국 언어의 탈윤리를 촉진하여 진실을 왜곡하거나 거짓 진실을 만들어낸다(Levitin 2016). 탈진실(post-truth) 시대에는 언어를 다른 표현예술과 결합하여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를 폭발적으로 유도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대신에 편견을 생산하고(Sandel 2014) 상대방의 부도덕성과 비정상성을 비웃고 모욕하고 비하하고 그들을 향한 분노의 메시지를 확산하는 풍자 노래와 그림, 야외전시, 대중공연 등이 ‘표현의 자유’를 내걸고 시위의 현장에서 연설과 함께 전개된다.

  민주정치가 대중선동을 위한 증오 표현과 낙인찍기의 장으로 변하면서 거칠고 혐오스러운 표현이 일상을 채우고 이전의 정치문화로 말해지는 어떤 미덕도 ‘대의명분’을 위하여 양보해야 한다는 풍조가 지배하기 시작한다. 대중정치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대립이항적 분류체계로 정리함으로써 그 단순함으로 인하여 강렬하고 명료하게 편가르기를 시도한다. 분류체계의 긍정적인 항목에 자기 집단을 위치시키며 상대방을 그 반대의 부정적인 항목에 연결함으로써 어떤 행위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느 편에 의한 것인가에 따른 판단을 하는 성향을 만들어낸다.

  언어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머리에 어떤 현실을 각인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언어폭력은 발화자가 내뱉고 가버리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필요성에 따라 재생된다. 그리하여 서로 복수를 위한 끝없는 혐오와 증오의 재생산을 추구하게 된다. 당면한 갈등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제한적인 언어폭력을 내뱉는 ‘표현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호받을 권리’ 사이의 충돌이다.

 

2) 디지털 혁명과 혐오의 확산

  디지털 시대의 혐오 표현 내용과 방식은 그 이전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마트폰, 인터넷, 유튜브,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의 기술 플랫폼이 대중화하면서 개개인이 뉴스의 제조자이며 항시적인 유포 네트워크의 운영자가 됨으로써 기존의 신문과 방송의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압도한다. 이러한 첨단 통신기술의 소유 정도에 따라 사회적 소통의 공간이 결정되므로 나이 든 세대일수록 발언권과 영향력이 줄어든다. 오늘날 세대 간의 차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 능력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디지털 폭력은 한 사회 내부의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지만 초국적인 공간을 구성한다. 한·중·일 세 나라의 젊은 세대는 디지털 통신체계를 이용하여 상호 초국적 문화소비를 즐기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와 결탁하여 상대방에 대한 물어뜯기를 거침없이 하는 풍조를 증대시키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가 강력한 정치적 자원이 되고 있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제반 사회적, 경제적 구조 변화와 함께 한국 현대사의 특별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혹은 반자본주의), 국가주의와 시민의 자유, 국가와 사회 등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진행되어 온 특수한 정치구조와 과정이 일상세계에 뿌리박혀 있다. 여기에 오랜 역사적 기억이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지역감정, 강력한 정부의 통치에 맞선 시민적 저항이 남긴 신체 정치의 상흔, 그리고 급진적이고 압축적인 현대화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격차, 산업구조의 변화와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계층적 재편과 인간적 존엄의 훼손 등이 교직되어서 한국 특유의 정치와 사회의 다이내믹스를 실현하는 문화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 결과적 특징은 역사 기억과 의식,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면서 사회 성원 사이에 타협과 화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하고 팽팽하게 상호배타적인 가치와 세계관의 이분법적 분류체계를 만들고 있다.

  현대사에서 혐오 표현과 혐오스러운 표현이 특별히 심각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민주화 바람 속에서 규제와 규범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유행하면서 대중과 민중의 권리가 모든 권리에 우선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립되었다. 대중 혹은 민중이 이전의 국민과 모범시민의 개념을 대체하였다. 사회적 지도자가 될 이상적 모델이 중산층 가정과 좋은 학벌과 모범생 출신에서 가난과 소외계층의 배경을 가진 이로 변하였다. 과거에 대한 분노가 인권개념과 결부되면서 폭력적 언어행위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중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의 일상적 언어행위에 욕설과 비어와 속어의 남용이 두드러졌으며 저항, 혐오, 증오, 분노의 폭발적 표현이 전통적인 문화적 규범을 넘어서 개인의 당연한 권리의 실천행위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사상 혹은 생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 가치로 부상하였다. 뻔뻔하고 막무가내이며 규범을 우습게 아는 억척스러움을 ‘아줌마’ 이미지로 만들어 그것이 이 나라를 지탱해 온 문화적 저력이라는 찬사와 함께 따돌림, 패거리 짓기, 낙인찍기, 그리고 폭력적 언어와 민중예술이 결합한 혐오 표출의 문화 장르가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일상이 정치적 관심과 편가르기로 채워지는 ‘정치의 사회’가 되었고 정치공학이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정치의 장(arena)에서 언어는 자신의 정당성을 이성적으로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악마화함으로써 반사이익을 취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사용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인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진영 간의 대립은 혐오 표현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대규모 정치적 대중시위는 그 이전의 절제되고 정화된 언어 대신에 조야하고 폭력적인 단어와 격렬한 감정을 유도하는 언어행위, 즉 구호의 외침과 연설뿐만 아니라 풍자와 조롱과 공포를 자아내는 그림과 음악과 연극의 장르들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일련의 증오와 분노의 표현 경험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델로 삼아 더욱 정교하게 발달한다. 미혼 여성 대통령에 대한 극단적인 외설과 욕설과 저주의 표현들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국민의 알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하고 성스러운 행동으로 주장되었으며 개인이 보호받아야 할 기본적인 인간적 존엄의 권리는 표현의 자유에 우선권을 양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대통령의 탄핵과 정권교체의 성공은 언어의 힘이 대중정치의 핵심적 힘이며 수단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 이후 한국의 정치는 진실 규명이 아닌 이미지 만들기와 상대방 혐오 부추기기 경쟁으로 되었고 정치적 언어행위에는 분노를 유발하는 역사기억이 동원되며 격렬한 감정과 상상을 자극하는 형용사와 부사 사용이 적극 사용되었다. 대중은 제공되는 언어와 (조작된) 뉴스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입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 방향의 것만 선택한다. 대중의 확증편향증과 언론매체들의 정치적 성향, 그리고 정치가들이 결탁하여 언어의 무기화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양극화 모델이 가장 효과적인데 그것은 정치자원으로서의 여론조사 방식과 통계 수치로서 의도적으로 생산된다. 이 양극화는 궁극적으로는 정의로운 전사와 사악한 무리, 즉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정리된다. 정의로운 자는 자기가 정의롭다는 이유로 어떤 부정이라도 정의의 실천행위로 인정되어야 하고 사악한 무리의 어떠한 언어와 물리적 행동은 그들이 사악하기 때문에 불법이며 폭력으로 단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양극화와 이분법은 대립구도의 상상을 현실로 보이게 만든다.

  또한 역사지리학적 편견과 상상으로 발명되고 재소환되는 혐오와 증오의 표현기제가 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기억과 역사의식을 정치적 자산으로 조작한다. 특히 지역을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역사의 연장선으로 놓고 이를 선악과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적 가치체계에 각각 위치시키면서 혐오와 증오의 언술을 생산한다. 조선조의 동서 당파 혹은 노론과 남인의 싸움이 아직도 권력생산 영역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한국에서 양극화의 논리가 정치적 혐오 표현의 기제로 이용되지만 그것이 곧 사회 성원이 고정적으로 양분된다는 뜻은 아니다. 시민은 다양한 성향으로 나누어지고 다양한 욕구와 다양한 목적에 따라 수시로 이합집산을 하는 구조적 융통성을 갖는다. 예컨대 경제적 계층은 다양하며 세대 성향도 다양하다. 특히 도시 중산층은 ‘강남좌파’에서 보듯이 수익과 소비생활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도 자기보다 훨씬 더 높은 경제수준의 사람들 앞에서 겪는 굴욕감과 좌절감을 가질 때 ‘상층’에 대한 도덕적 반감—즉, 자기보다 더 많은 경제수익을 올리는 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했거나 부정한 권력과 결탁한 것으로 보기—을 가지게 되어 ‘서민’에 들기를 자청하며 ‘서민’의 입장에서 격차와 불평등의 구조를 혐오하고 분노한다. 그러한 감정은 그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하고 저소득층에 대한 도덕적 열등감을 은폐해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수의 상층집단과 포괄적 빈곤층 혹은 비상층으로 양분된다. 실재의 계층과 관계없이 각자 스스로 소속을 정한 진영논리로 상대방(불특정 다수)에 대해 혐오와 증오를 표현한다. 대중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전략은 대중의 분노를 유도하는 것이다. “분노하라!”는 선동적 구호에는 반대편을 부도덕과 뻔뻔함과 비인간적 잔인성을 갖춘 괴물로 만드는 언술이 담겨 있다. 

6. 결론: 양심의 연대

  현대 사회는 다양한 성향과 세력으로 분리되고 그들이 맺는 상호 관계의 정치적 과정에서 특징이 드러난다. 개별화된 세력들이 감당할 수 없는 모순된 구조의 힘과 틀을 깨는 저항과 창조의 동력으로서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의 표현 기술을 개발한다. 현실 참여의 한 방식으로서의 감정의 정치자원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표현의 진실성과 방식이다. 공동의 선을 추구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인 폭력이 언어를 통하여 실천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쓰레기로 배출이 되는 언어행위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공공의 세계를 건설하기보다는 끝없이 더욱 악화되는 사회적 상처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탈진실 혹은 거짓말 그리고 극단적 혐오 표현의 무제한하고 통제 불능의 확산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이 새로운 폭력의 일상에 묻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 됨’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물론 우선적으로 거짓말과 편견을 어마어마한 속도와 분량으로 재조 유포하는 디지털 기술의 힘에 대항하여 탈진실에 기만되지 않는 디지털 리터러시(문해력)를 확보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사물과 사건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긴 시간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진실성의 훈련을 일상화해야 한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올바른 언어사용의 훈련 그리고 민주주의 토론과 열린 대화의 장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는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건전한 시민정신과 양심의 네트워크 건설이다. 포퓰리즘은 대중민주주의로 포장되지만 대중선동을 통하여 상대방을 공정한 대화의 범주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파멸시킨다. 

  인종적 혐오와 증오를 만들어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불가항력적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부’ 권력의 명령에 따른 영혼없는 가련한 인간기계였을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아렌트의 통찰력을 기만하였다(Arendt 2006). 대개 사람들은 일이 끝난 뒤에야 “나는 실체를 알지 못했고 나 역시 기만당한 꼴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를 ‘편리한 어리석음’으로 서술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제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 사고방식과 철저한 검증의 습관을 포기하고 대중선동의 레토릭과 기술에 어리석음을 동원하여 편리하게 휩쓸리는 대중심리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대중은 단기간의 조작에 의해 선동되고 유혹되는 면이 있지만 그 밑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예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다름과 낯섦에 대한 소통과 문화 자각 능력을 증대하고 양심의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감정의 정치는 가시 돋친 말로 타자를 특종의 혐오스러운 존재로 범주화하고 증오와 분노로써 배제하고 파멸시키는 것이다. 가장 실질적인 해결책은 언어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편견과 거짓으로 대중을 호도하고 혐오 표현으로 선동을 시도하는 ‘말’의 독점자들의 정체를 간파하는 예지와, 언행의 불일치를 거부하는 시민적 용기를 구축하는 일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는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연결성(connectivity) 속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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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Arendt, Hannah, 2006, Eichma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Penguin Books.

    Bauman, Zygmund, and David Lyon, 2012, Liquid Surveillance, Cambridge: Polity Press.

    Bauman, Zygmund, and Leonidas Donskis, 2013, Moral Blindness: The Loss of Sensitivity in Liquid Modernity, Cambridge: Polity Press.

    Bourdieu, Pierre, 1992, Language and Symbolic Power, Cambridge: Polity Press. 

    Davis, Shelton H., 1977, Victims of Miracl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Hebdige, Dich, 1979,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London: Methuen & Co. Ltd. 

    Levitin, Daniel J., 2016, Weaponized Lie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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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loterdijk, Peter, 2006, Zorn und Zeit: Politisch-psychologischer Versuch, Frankfurt am Main: Schurkamp Verlag. 

    Waldron, Jeremy, 2012, The Harm in Hate Speech,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Willis, Paul, 1977, Learning to Labour, London: Saxon House. 

저자 소개

김광억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학과 및 고고인류학과 학사, 영국 Oxford대학교 사회인류학과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분야는 문화와 정치, 음식문화, 종교현상 등이며, 중국전공자로 중국, 대만, 한국에서 현지조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