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마치며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수정

1. 집필의 계기, 혹은 배경은 무엇인가요?

  ‘황량함과 풍요로움이 기묘하게 섞여 있는 곳.’ 비잔티움 미술 연구를 시작하고 처음 카파도키아를 방문했을 때 들었던 생각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바위 동굴의 서늘함, 흙먼지 날리도록 바싹 메마른 언덕 옆으로 흘러가는 시냇가의 촉촉함, 투박하고 거친 돌산 안에 감춰진 가슴 뭉클한 그림들. 도대체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하는 곳이 카파도키아였습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대체 누가 여기에 그림을 남겨놓았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희망으로 들뜨게 하고 삶이 떠오르는 대지로 달려가게 했을까요? 그들은 어떤 그림자 앞에 두려워 떨고 몸을 숨겼을까요?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는 너무도 먼 시간과 공간 안에 살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이해할 수나 있을까요? 생경한 카파도키아의 자연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카파도키아 미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제대로 된 연구 서적 몇 권 없는 역사학의 불모지에 서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듬더듬 길을 찾으며, 암중모색하는 사람처럼 카파도키아 미술을 주제로 삼은 논문을 한 편씩 써나갔습니다. 서로 연결되는 길도 있었지만, 갈라진 길이나 막다른 길도 있었습니다. 20년간 미로 같은 길을 헤매다, 이제 어설프게나마 간략한 지도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연구자가 지녀야 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 지도를 발판 삼아 새로운 연구의 모험을 떠날 분들을 생각하며, 무모한 용기를 내어 보았습니다.

2. 카파도키아 교회미술의 도상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성북동 성당에 새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서양미술사를 오랫동안 공부해서 웬만한 그림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대 오른쪽의 유리화는 어느 도상을 표현한 것인지 선뜻 말하기가 어려워 작가의 창의력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유학 중에 비잔티움 미술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것이 ‘아나스타시스(Anastasis)’ 도상의 변형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서유럽 미술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후 영광스러운 부활 도상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미술에서는 ‘아나스타시스’, 즉 그리스도가 저승으로 내려가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선한 영혼들을 구해내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죽음의 세계에 잠들어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생명을 다시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이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련된 선물 같은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카파도키아의 사람들은 동굴을 깎아 만든 성당 벽에, 그리고 고인을 기리는 무덤 벽에 ‘아나스타시스’를 그렸던 것입니다.

  다시 성북동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게 되면, 카파도키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고인들을 위해 부활의 희망으로 두 손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저자로서 카파도키아 미술을 연구할 때,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카란륵 킬리셰 

 

  카파도키아 지역의 상황을 알려주는 사료는 아주 드뭅니다. 게다가 누가 작품을 제작했는지에 관한 정보도 거의 남아있지 않지요. 따라서 현대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둘러싼 컨텍스트 분석이 중요한데,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역사서뿐 아니라 교회 문헌을 찾아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4. 책을 집필하면서 대중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은 카파도키아 미술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술성이나 기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화려하고 세련된 미술에 비해 카파도키아의 미술은 투박하고 격이 낮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카파도키아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창조와 혁신의 땅이었고, 특히 성화상논쟁 시기 이후로는 예언자들이 함께 그려진 ‘마예스타스 도미니’ 같은 놀라운 도상을 탄생시켰습니다. 비잔티움 세계의 예술가에게는 전통을 준수하는 것이 으뜸가는 덕목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카파도키아의 화가들은 창의성을 발휘하는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카파도키아의 그림 구석구석에는 정감이 넘치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가득해서, 엄숙하기만 한 종교적 도상이 생동감과 친밀감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5. 책을 집필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나 발견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비잔티움 예술 활동의 절정기인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의 작품들은 카파도키아에 가장 많이 남아있습니다. 무려 1000년을 버텨온 귀한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작품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거나 인위적인 수단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옛 작품이니 잘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문학이 설 자리는 바로 거기입니다. 
 

6. 향후 연구 계획은 무엇인가요?

  비잔티움 세계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었고 또 중세 서유럽에도 전해졌지만, 저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인류 구원사의 중심에 가까이 있었던 테오토코스입니다.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시작되는 테오토코스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시각적 방식으로 제시되었는지, 왜 그렇게 해야 했을지 등에 관한 물음으로 새로운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본 연구는 대우재단의 2017년 학술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은 2023년 6월에 645번째 대우학술총서로 발간되었습니다.
 

저자 소개

조수정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서강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과 종교학을 공부하였고,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대학, 스트라스부르 제2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파리 제1대학에서는 졸리베 레비(C. Jolivet-Levy) 교수의 지도로 카파도키아의 비잔티움 교회 벽화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비잔티움 고고미술사연구소와 프랑스 학술원 산하의 비잔티움 도서관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와 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세 서유럽과 비잔티움의 종교와 예술, 그리고 상징과 도상학에 관련된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